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문단 편집) == 몰락 == 그리고 1987년 2월 1일에 열린 국민투표 결과(찬성 86%)에 의거하여[* 참고로 이 선거는 1973년 이래 에티오피아에서 열린 최초의 선거인데 사실 군정 기간의 에티오피아에서는 선거 자체가 전혀 치러지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에 대항하던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의 [[에리트레아]]도 2003년 이후 20년간 선거 자체를 전혀 치르지 않고 있는데 군정이었던 멩기스투와 달리 아페웨르키는 명목상으로는 공화제인데도 선거를 치르지 않고 있으니 멩기스투보다 더 질이 나쁘다고 할 수 있다.] 1987년 9월 10일에 멩기스투는 [[군정]]을 폐지하고 에티오피아 공산당 1당만이 합법 정당으로 허용된 [[에티오피아 인민 민주 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포해 이틀 뒤인 9월 12일에는 멩기스투 자신이 대통령직에 올랐지만 멩기스투가 군정을 폐지했다고 해도 변한 것은 없었고 결국 그의 폭정과 가난을 참다 못한 반군들이 들고 일어났다. 1988년 5월 8일에는 [[멜레스 제나위]]가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민주주의전선(EPRDF)을 결성했는데 멩기스투는 이러한 반군 세력들을 진압하기 위해 정부군 병력을 동원하여 반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펼쳤지만 워낙 멩기스투가 저지른 일들이 잔혹했고 그에게 원한이 뼈에 사무친 사람들이 많았기에 많은 에티오피아 국민들이 반군을 지지하였다.[* 황당하면서도 웃긴 이야기인데 EPRDF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사회주의]]를 표방한 단체였다. 멩기스투는 공산주의 간판만 내걸고 사실상의 군부 독재를 했고 이게 많은 국민들의 반감을 샀던 것. 문제는 EPRDF도 [[현실사회주의]]에 따라 충실하게 독재를 자행했고 [[아비 아머드 알리]] 총리가 그나마 통제 정책을 완화한 정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EPLF의 의장이었던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도 [[에리트레아]]의 초대 대통령이 되지만 아페웨르키도 멩기스투의 2배 정도나 되는 무려 30년에 달하는 장기 집권을 하며 에리트레아를 현 시점 최악의 인권탄압국으로 만든 독재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멩기스투의 정부군은 1988년 3월 17~20일에 일어난 '[[엘 알라메인 전투]] 이래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최대의 전투'로 평가받았던 EPLF와의 아파벳 전투에서 [[소련군]]의 지원을 받은 에티오피아 최고의 사단이 대패하고 많은 장비를 잃은 것을 시작으로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주요 거점지와 도시들을 반군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이렇게 수세에 몰린 멩기스투는 13세 이하의 소년 10만 명을 [[소년병]]으로 강제 징집하도록 명령하며 구설수에 올랐는데 이렇게 징집된 아이들은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얻어맞기만 하면서 훈련은 제대로 못 한 상태로 '세계에서 가장 잘 훈련되었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던 반군들과 싸우게 되었다. 그리고 멩기스투는 아예 내각의 대부분을 에리트레아의 중심지인 [[아스마라]]로 옮기며 자신이 직접 에티오피아 국군의 작전을 지휘했지만 멩기스투는 120억 달러에 달하는 소련의 군사 지원을 받은 총인원 30만 명의 에티오피아 국군이 수적인 우세만으로 반군을 이길 것이라고 믿어서 전략을 제대로 따지 않은 채 전투에 나서서 에티오피아 국군은 반군과의 전투에서 줄줄이 실패했다. 물론 멩기스투는 패전의 책임을 부하 장군들에게 돌리며 부하 장군들을 처형했다. 1988년 6월 22일에는 티그라이 지역의 고원에 있는 하우젠(ሓውዜን, Hawzen)이라는 마을에 반군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 4대의 [[MiG-21]]과 [[건쉽]]을 동원해 장날을 맞이한 마을에 무자비한 폭격을 퍼부어 2500명 이상의 민간인들이 사망했고 고대의 비석 4개도 파괴되었다. 이 폭격 명령을 내린 사람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당시 티그라이 지역의 신입 계엄 행정관이었던 레게세 아스파우(Legesse Asfaw)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큰 비난을 받았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실제로 이 사건 이후 반군에 대한 지원이 급증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것처럼 당시 에티오피아 북부에는 단순히 '반군에 협조할 것이다'라는 이유만으로 에티오피아 공군에게 폭격당한 마을이 많았다. 심지어 1989년 5월 16일에는 멩기스투가 동독을 국빈 방문할 동안 고위 장군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 다만 그 쿠데타 시도는 멩기스투가 하루 만에 돌아오고 3일 간의 전투 끝에 국방부 장관을 포함한 44명이 죽고 176명의 쿠데타 관계자들이 체포되면서 실패로 끝났으며 육군 참모총장과 공군 사령관 등 9명의 장군들이 쿠데타 진압 직후에 재판도 없이 초법적으로 처형되었고, 1년 후인 1990년 5월 19일에는 12명의 장군들이 재판에서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대통령궁 지하에서 처형되었다. 이는 멩기스투가 국민들 사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권력층 사이에서도 민심을 잃었다는 신호였다. 이 쿠데타의 영향으로 일반 사병의 탈영 비율이 증가하게 되었다. 더욱이 [[냉전]]이 종식되고 멩기스투 정권을 지원하던 당시 공산권 국가들이었던 소련과 쿠바마저 지원을 끊으면서 멩기스투는 외교적으로 고립되기 시작했고 1991년 4월 20일에는 '조국을 온전한 상태로 보호하기 위해' [[총동원령]]을 선포하고 개각을 감행했으나 1991년 5월 무렵에는 몇몇 에티오피아의 의원들이 멩기스투의 몰락이 가까워졌다는 걸 인지하고는 멩기스투 시대 의회에서 활동할 동안 유일하게 멩기스투를 맹비난하게 되었고 결국 1991년 5월 21일에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민주전선(EPRDF)에게 빼앗기며 멩기스투는 패망했다. 멩기스투의 패망 후 에티오피아에서는 벌집이 될 정도로 무수한 총알을 맞은 멩기스투의 포스터가 발견되었으며 아디스아바바에 있던 9m 높이의 [[https://scontent-ssn1-1.xx.fbcdn.net/v/t1.6435-9/120883964_996163897516936_4870482140929281018_n.jpg?_nc_cat=110&ccb=1-7&_nc_sid=730e14&_nc_ohc=5eqK6Nh8dTsAX_JVUBy&_nc_ht=scontent-ssn1-1.xx&oh=00_AfByV7lDxrYZotc6KjO--N71ZkjuzFTpIg_MHGovgcUEBg&oe=64C9E638|레닌 동상]][* 1984년에 멩기스투의 쿠데타 10주년을 기념하여 소련이 선물해 준 것이다.]이 철거될 때의 분위기는[* 참고로 이 철거를 주도한 사람은 티글라친 기념비를 제작했던 건축가였다.] 마치 [[베를린 장벽]]이 철거되었을 때의 분위기와 같았다고 한다. [[https://www.tampabay.com/archive/1991/05/24/monument-to-mengistu-rule-comes-down/|#]] 멩기스투의 몰락 이후 EPRDF를 이끌던 멜레스 제나위가 불과 36세의 나이에 에티오피아의 대통령에 등극한 후 새로운 [[독재자]]가 되어 에티오피아를 지배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